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 KAL 858 폭파사건과 정치적 활용의 실체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기가 미얀마 인근 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해 탑승객 115명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이 비행기에는 우리 국민 93명을 포함해 외국인 22명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준 이 KAL 858 폭파사건은 단순한 테러를 넘어 한국 정치사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북한의 공작원에 의해 자행된 이 테러 사건은 당시 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에 의해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용되었을까요? 오늘은 사건의 전말과 그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의도를 살펴보겠습니다.


KAL 858기 폭파, 그 충격적인 사건의 전개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를 출발한 대한항공 858기는 아부다비를 경유해 서울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는 미얀마 인근 안다만해 상공에서 갑자기 레이더에서 사라졌고, 결국 폭발로 인한 추락으로 115명의 승객과 승무원 모두가 사망했습니다. 사건 직후 수사가 진행되면서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가 범행의 주범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에서 발급받은 가짜 일본 여권으로 '하치야 신이치'와 '마유미'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습니다. 두 공작원은 바그다드에서 아부다비까지만 대한항공 858기에 탑승한 후, 비행기 선반에 '라디오'로 위장한 액체폭발물과 시한장치를 설치했습니다. 아부다비에서 하차한 후 비행기는 이륙했고, 9시간 후 설정된 시한장치에 의해 폭발했습니다.
사건 개요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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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일 | 1987년 11월 29일 |
피해 상황 | 승객 및 승무원 115명 전원 사망(한국인 93명, 외국인 22명) |
범행 주체 | 북한 특수공작원 김현희, 김승일 |
폭발 장소 | 미얀마 인근 안다만해 상공 |
폭발 방법 | 라디오로 위장한 액체폭발물(PLX)과 시한장치 이용 |


김현희의 체포와 충격적인 자백
사건의 주범 김승일과 김현희는 아부다비에서 로마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그러나 가짜 일본 여권이 발각되어 바레인에서 억류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승일은 독약을 음독해 자살했습니다. 김현희는 한국으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김현희는 일본인 마유미로 신분을 위장했으나, 50일간의 조사 끝에 자신이 북한 공작원임을 시인했습니다. 그녀는 북한의 지령을 받아 KAL 858 폭파사건을 자행했다고 자백했습니다. 김현희의 자백은 당시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곧 안기부에 의해 정치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북한 공작원 김현희입니다. 저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의 정세를 혼란스럽게 하고 국제적 위신을 추락시키기 위해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아 대한항공기를 폭파했습니다."
- 김현희의 1988년 1월 15일 기자회견 중 발언

안기부의 정치적 활용과 북풍공작
KAL 858 폭파사건이 발생한 1987년은 한국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당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6월 민주항쟁이 있었고, 1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집권 여당인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야당의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게 지지율이 뒤처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KAL 858 폭파사건은 안기부에 의해 '북풍공작'의 일환으로 활용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김현희의 자백이 나온 시점이 대선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이었고, 이를 통해 안보 불안 심리를 조성해 여당 후보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활용 의혹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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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공작 의혹 | 안보 위기를 조성해 여당 후보에게 유리한 선거 환경 조성 |
시기적 의문 | 김현희 자백 발표 시점(12월 16일)이 대선(12월 19일) 직전 |
안기부의 역할 | 사건 수사와 정보 통제를 통한 여론 형성 |
정치적 효과 | 안보 이슈 부각으로 보수층 결집 유도 |

사건 이후: 진실 규명과 과거사 정리
김현희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특별 사면되었고, 이후 한국에 정착해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 폭파사건의 진상 규명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2007년에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사건 자체는 북한의 소행이 맞지만, 당시 안기부가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 인정되었습니다.
특히 김현희의 자백 시기와 그 공개 방식이 대선에 영향을 미치도록 전략적으로 조정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또한 안기부가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도록 언론을 통제했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결과 (2007년)
- 폭파 사건 자체는 북한의 공작으로 확인
- 안기부의 정치적 활용 의혹 일부 인정
- 김현희 자백 공개 시점의 전략적 결정 확인
- 언론 통제를 통한 사건 확대 보도 확인

KAL 858 폭파사건과 한국 현대사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은 단순한 테러 사건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냉전 시대 남북 대립의 비극적 단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안보 이슈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건 발생 이후 3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의문점이 남아있습니다. 김현희의 자백이 진실인지, 안기부의 정치적 활용은 어디까지였는지, 그리고 이 사건이 1987년 대선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건의 역사적 의미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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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와 정치의 관계 | 안보 이슈가 정치에 활용되는 메커니즘 보여줌 |
냉전의 비극 | 냉전 시대 남북 대립의 극단적 사례 |
민주화와의 관계 |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안보기관의 정치 개입 사례 |
과거사 청산 과제 | 진실 규명과 역사적 평가의 중요성 제기 |

결론: 비극적 사건이 남긴 교훈
KAL 858 폭파사건은 115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 비극적 테러였습니다. 동시에 이 사건은 안보 위기가 정치적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사건의 배후에 북한이 있었다는 점은 명확하지만, 안기부의 정치적 활용 의혹 역시 과거사 정리 과정에서 일부 인정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안보 문제가 정치적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되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어떤 정치적 목적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중요한 과제임을 알려줍니다.
오늘날에도 폭파사건의 모든 진실이 밝혀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비극적 사건을 통해 우리는 평화의 소중함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안보 이슈를 활용하는 것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